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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話者는 자살을 돕는 일을 한다. 살인 청부가 아니다. 멀쩡한 사람을 자살로 몰아넣는 일도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삶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에게 방법을 제공하고 실행을 돕는 사람이다. 실행을 대신 해주지도 않는다. 자살을 돕고,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이 책은 화자의 이야기와, 화자가 쓴 소설의 내용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화자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 작품은 잘못 읽으면 자살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제목부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고, 화자는 '삶을 연명해가는' 자들을 혐오하며, 자살을 결심한 유디트는 자살을 결심한 후에야 진심으로 즐거워할 수 있었고, 미미는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 뒤 웃으며 죽었다. 살아남은, 살아가는 C만이 실패자인 것처럼 패배자인 것처럼 그려진다.
압축할 줄 모르는 자들은 뻔뻔하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어차피 패는 처음부터 정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패는 아마도 세 끗쯤 되는 별볼일 없는 것이었으리라 (중략) 어서어서 판이 끝나고 새로운 패를 받길. 그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아무도 무료한 겨울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불을 질러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를 태워버릴 수 밖에 없다.
읽으면서 의구심에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읽어도 자살을 방조하거나 찬성하거나 권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명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고, 나름 상도 받은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내용을 쓰고도 문제가 되지 않은 건가?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의문이 해소된다. 작가는 이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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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자살을 돕는 사람이다. 그는 신을 자처한다. 그리고 죽음을 상징한다. 죽고 싶은 사람들에게 방법을 제공하고 실행을 돕는다, 실행을 대신 해주지도 않는다, 죽음의 직전에 망설임이 있는 자들을 돌려세운다, 죽음을 택한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킨다. 자살에 대해 방관자적이고 자살에 대해 긍정적이다.
의뢰인들의 상황은 상세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한 명은 힘든 삶을 살았다, 한 명은 진정한 예술 앞에서 고뇌했다, 라는 단편적인 정보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심리 상태에 집중해서 그들을 설명하지, 상황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어야겠다는 결심이 기쁜 사람, 즐거운 사람, 행복한 사람들이다.
화자는 호객하지 않는다. 되려 자격이 없는 고객은 거부한다. 이 의뢰인들 정도로 죽음을 갈구하고 죽음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돌아가라고 말한다.
요컨대, 죽음은, 신은, 작가는, 죽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전략)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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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반적으로 상징적이고 추상적이다. 최신작인 '살인자의 기억법'이나 '오직 두 사람'으로 김영하를 먼저 접한 나로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좋게 말하면 깊이가 있고 숨겨진 의미를 찾는 재미가 있다고,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현학적이고 허세 가득한 문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읽었을 때는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곧바로 다시 읽어야만 했다 (내 독해력이 나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도 두 번만 읽고 주제를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였(다고 생각했)으니, 이런 문체의 작품으로써는 나쁘지 않다 하겠다.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모 작품은 네 번을 읽었지만 한 주요등장인물의 감정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몇 년 전에 읽은 두어 작품들은 끝끝내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이해를 포기했었다.
나처럼 김영하의 최신작을 먼저 읽고 그 문체가 마음에 들어 이 책을 선택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은 말리고 싶다. 이 책이 어떤 분위기의 책인지 정보를 준 뒤에 다시 판단하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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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아직 더 생각해볼 만한 인물들이 남아있다. 작품에 등장한 두 명의 의뢰인과 모두 접점을 가지고 있는 C. 화자의 여행 중 화자와 만난 동양인 여자 여행객. 그들이 어떤 의미로 이 책에 등장했고 그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백 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음에 다시 읽을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그 둘에 초점을 맞출 테니 또 다르게 다가올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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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의문 중의 하나, "여러 번 읽어야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과연 좋은 작품인가?"
이 책을 통해 얻은 정답은 "그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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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적당히 자극적이고 적당히 추상적이다. 메시지를 말하는 방법이나 메시지 자체도 마음에 든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의 그 쾌감은, 꽤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