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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수는 1910년생이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일제강점기와 전쟁통 속에서 살았다. 살아남았다, 라는 의미에서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보통의 사람이었다. 시대에 치이고 전쟁에 치이면서,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보통의 사람이었다.
그에게 삶이란 발 디딜 곳 없는 고통의 순간들이었다. 살아남았을 뿐, 전쟁이 끝나서도 어느 한 곳에 발붙이지 못했다. 가족들을 내버려 두고 세상을 떠돌았다.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다.
아버지는 삶에 부딪혀서 비틀거리는 것인지, 삶을 피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마장세는 알 수 없었지만, 부딪히거나 피하거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영생을, 부활을,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냐는 신부의 말에 마동수는 모두 거절을 표했다. 죽음에 이끌려가기 바로 직전에, 저승이라 생각한 곳에서 이승의 잔영을 보고는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삶은 고통이었다.
- 마동수 님은 영생을 원하십니까.
마동수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 마동수 님은 죄의 사함과 부활을 믿으십니까.
마동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아무런 초점이 없었다. 신부가 다시 물었다.
- 마동수 님은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십니까.
마동수가 고개를 다시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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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순은 전쟁통에 남편과 딸을 잃었다. 고향은 이북이었고,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피난지에서 만나 같이 살게 된 남자는 아이를 둘 낳고도 집에 정착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밖을 떠돌았다. 가끔, 몇 주 혹은 몇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그를 보며, 그가 왜 돌아오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기댈 곳이 없었다. 정착할 곳도 없었다. 집세가 오를 때마다 집을 옮겨 다녔다. 그녀에게 삶은 고통이었다.
시장 봐서 집에 가는 여편네들을 보니까, 왠지 널 살리고 싶어서 그냥 병원을 나와버렸어.
그녀가 바랐던 것은 평범하고 아늑한 가정이었다. 둘째 아들을 중절하려고 산부인과에 갔을 때, 중절을 포기하게 했던 것.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장을 보고 돌아가는 주부의 모습. 그것이 그녀가 원하던 삶이었다. 평범한 삶. 하지만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예절은 빠르고 가볍게 이승에서의 흔적을 지워주는 것이었다. 죽은 어머니도 거기에 동의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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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세 마차세 형제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다.
마장세는 그런 부모의 삶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인연의 사슬을 끊어내고,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는 베트남 파병이 끝나고 제대한 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괌으로 떠났다.
그는 인연을 끊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멀어졌을 뿐 끊어내지 못했다. 한국을 '거기'라고 표현하고,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네가 힘들겠구나'라는 말로 거리를 두려 했지만, 인연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출장 차 괌으로 찾아온 동생과의 대화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스스로 먼저 끄집어낸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기댈 곳 없고 머무를 곳 없는 것은 그의 아버지와 똑같았다. 그는 아버지와 매우 닮아있었다.
마장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죽음에 의해서 인연의 사슬이 단절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다가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인가.
니가 힘들겠구나 라는 마장세의 어조는 오래전과 똑같았다. 그 어조는 힘듦을 객관화해서 밀쳐내고, 거기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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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세도 부모와의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같았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같았다. 그가 형과 달랐던 것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어머니의 넋두리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고 바라보면서, 그는 그 나름의 마무리를 했다. 매듭을 지었다.
또한, 그에게는 아내라는 거점이 있었다. 그를 이해해주고 버팀목이 되어줄 가족이 있었다.
마차세는 결혼이 그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박상희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의 질감이 마차세의 마음에 쟁여지기를 바랐다.
마장세는 끝까지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려고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인연의 덫은 그를 더욱 옭아맸다.
마차세는 외면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직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올가미를 조심스럽게 풀어내고 갈 길을 갔다.
난 아버지를 묻을 때 슬펐지만 좋았어. 한 세상이 이제 겨우 갔구나 싶었지. 이런 사람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빌면서 흙을 쾅쾅 밟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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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다. 이 책은. 극적이지도 역동적이지도 않다. 담담하다. 건조한 어투로 사실을 이야기한다. 인물들의 생각에는 추상적인 표현을 쓰지만 신기하게도 명료하다. 무겁고 우울하긴 하지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한 번에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책을 덮고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시대의 무서움, 인물들의 고통, 괴로움이 나를 물고 늘어져서 쉽지 않았다.
좋은 책이었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