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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코는 어렸을 때부터 억압받는 삶을 살았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산속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저택에서 살게 되었고, 당연히 주변에 친구는 없었다. 친했던 이모는 자살했고, 이모부는 교육을 핑계로 그녀를 학대했으며, 종국에는 그녀가 물려받은 유산을 노리고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불행했으며, 그 불행함을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처음으로 희망의 끈을 건넨 것은 후지와라 백작이었다. 본래 그녀를 꼬드겨 결혼하고 재산을 가로챈 뒤 정신병원에 가둬 버릴 속셈이었던 그는, 사기꾼의 직감으로 그녀가 남자를 혐오하고 자신에게 넘어올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는 히데코를 꼬실 생각을 버리고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저 괴물(이모부)로부터 탈출시켜 주겠다. 대신 네 재산을 나눠달라.'
그녀도 이모부의 손에서 벗어나고야 싶지만, 도망치더라도 금방 잡힐 거라는 생각에 거절한다. 그녀는 죽음만이 그 괴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수단이라 믿고 있었으며, 실제로 때가 되면 - 그의 아내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면 - 그렇게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그녀를 설득했고, 히데코는 언제든 자결할 수 있는 강력한 극약을 백작으로부터 받는 것을 조건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백작에게, 자신을 대신해 정신병원에 갇힐 희생양으로 쓰기 위해 하녀 한 명을 구해달라고 요구한다.
영화는 백작이 히데코의 하녀로 숙희를 추천해 들여보내면서 시작된다.
히데코에게 저택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모는 자살인 것처럼 살해당해 높은 나무에 목이 매달렸고, 이모를 살해한 이모부는 이모를 학대했던 곳으로 그녀를 데려가 태연자약하게 '너도 도망치려고 하면 이모랑 똑같이 해주겠다 .'고 말한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에게 끊임없이 학대당하며, 그의 변태적인 사업에 이용당한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백작이 들이민 탈출 계획은 다시 안 올 기회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따라서 계획을 잘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신병원에 넘겨서 재산을 가로챌 생각을 하고 있는 하녀를 역으로 속여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히데코는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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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3장으로 구성되어있다. 굳이 각 장에 제목을 붙이자면 '탈출', '진실', '결말' 정도일 것 같다. 1장에서는 히데코와 숙희, 백작이 백작의 계획대로 탈출하고, 2장에서는 그 탈출극 속에 엉켜있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3장에서는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맺음.
이 영화는 진실을 잘 포장해 두었다가 차례차례 포장을 벗겨 낸다. 1장에서는 생각지 못한 반전으로 충격을 주는가 싶더니 2장에서는 1장의 복선들을 모조리 회수하고 설명을 덧붙이다가 다시 반전을 곁들여서 상쾌함과 통쾌함을 선사한다. 3장의 깔끔한 마무리까지, 개연성의 부족함은 없고, 전개도 미흡함이나 늘어짐 없이 속도감 있고 긴장감 있다.
단지 '야하다'라는 입소문에 이끌려서, 수위 높은 장면에 대한 흥미 본위로 보게 될지라도 빠져들 수 있을 만한 이야기다. 야한 장면도 뜬금없거나 맥락 없이 서비스 신으로써 등장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영화에 관련된 관심과 기사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어디까지나 '수위 높은 영화'로서 기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에 매우 감사한다. 덕분에 나는 영화에 반전이 있다는 스포일러를 듣지 않고 영화관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덕분에 영화를 100퍼센트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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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도 사랑을 아나요?'
후지와라 백작도 마지막에는 히데코에게 빠져든다. 처음에는 '당신에게 흥미를 갖는 이유는 돈뿐'이라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당신에게 빠진 것 같다'며 결혼하자고 한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준 것은 물리적인 자유뿐이었다.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기는 없어요. 갓난아기하고 얘기할 수만 있었어도, 아가씨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너를 낳고 죽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고.'
숙희는 저택을 빠져나가기 직전, 밤에 하는 낭독회의 진실을 알고 분노한다. 그녀는 히데코가 강제로 읽어야만 했던 서적들을 찢고 잉크를 들이붓고 물속에 쳐박는다. 처음에는 머뭇머뭇 보고만 있던 히데코도 나중에는 책들을 훼손하는데 동참한다. 그녀가 구원을 얻은 시점은 바로 그 시점이었을 것이다.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 이모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분노해줄 사람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