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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는 불평등한 구조를 박살 내고 싶었다. 더러운 돼지우리 같은 꼬리 칸에 구겨 넣어진 채 앞칸의 인간들이 던져주는 최소한의 음식으로 연명하는 생활을 끝내고, 앞칸의 인간들이 독점한 안락함을 빼앗고 싶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벼르고 벼른 끝에, 꼬리 칸에 있는 사람들을 규합해 반란을 이끌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측근과 정신적 지주를 포함해 반란군의 대부분이 죽었다. 자신도 크게 다쳤다. 어찌어찌 열차의 지배자에게, 열차의 첫칸에 도달하지만 제압당한 체다. 모든 것을 걸었지만 얻은 것은 없고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열차의 주인의 손 위에서 놀아난 것임을 알게 된다.
'인구를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었어'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위치가 있어'
- 영화 '설국열차' 중
그는 절망한다. 자신이 믿었던 것들이 허상이었음을, 모두 주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음을 감당하지 못한다. 무력감과 원통함 속에서, 모든 것은 역할이 있고 균형이 필요하다는 주인의 말에,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 달라는 그의 말에 —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까지 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가 본 것은, 균형이라는 이름 아래, 각자의 역할이라는 명분 아래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마저 완전히 박탈당한 채 기차의 부품으로서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분개한다. 분노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렇게밖에 유지될 수 없는 기차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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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모두 기차에 대해 생각할 때, 오로지 민수만은 기차 밖을 생각한다. 시스템을 뒤엎으려는 커티스조차도, 기차라는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민수는 다르다. 그는 이 틀 자체를 부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기차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황당한, 기차 안의 상식을 거부한 그의 생각은 커티스마저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돕기를 거절한다. 하지만 모두가 무시하고 미쳤다고 수군거려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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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희생 위에서밖에 돌아갈 수 없는 시스템이라면, 없는게 나아.’ 거기에까지 생각이 도달한 커티스에게, 유일한 희망은 민수의 생각이었다. 결국 그는 민수를 도와 열차의 문을 박살 내고, 열차를 박살 내고 새로운 세상으로의 문을 연다.
혁명의 결과는 처참하다. 나라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지배층도 반란군도 사상가도 모두 죽었다. 살아남은 것은 사상과, 억업받던 피지배층뿐. 세상은 너무나도 춥다. 하지만 알려졌던 것처럼 얼어죽을 정도는 아니다. 생명이 살 수 있는 온도다. 그래도 여전히, 너무나도 춥다.
추위 속에서, 맹수가 살고 있는 야생의 추위 속에서, 어찌 되었건 자신들을 연명해주던 기차는 이제 없어졌다. 자신들을 위해 싸웠던 반란군도 사상가도 이제 없다.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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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당시부터 흥미가 가는 영화였다. 하지만 그때는 영화를 보는 취미가 없었고, 극장을 가는 취미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마침 극장에 가지 못하게 된 주말에, 뭘 볼까 생각하다가 이 영화에 생각에 미쳤다.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정말 재미있게 봤다. 급수 칸을 지나기 전까지의 액션씬들과, 급수 칸을 지나면서 반전하는 열차 분위기, 꼬리칸 쪽의 전쟁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여러가지 세세한 소품과 세트. 세상에 대한 비유가 정말 멋지고, 흥미로웠다.
단지 결말은 조금 아쉽달까, 마음에 들지 않는달까. 요나와 어린아이 한 명만 살아남은 듯한 결말은 너무 잔인한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영화니까 조금쯤은 희망찬 결말을 줘도 좋잖아.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