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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라이즈는 고층 아파트다. 마트, 운동 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하이 라이즈 안에 있다.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있는 그 건물은 이미 하나의 사회 그 자체이다. 그 사회로 주인공인 랭이 이사해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민들은 사는 층에 따라 계급이나 지위가 갈린다. 상층의 주민은 상류층, 하층으로 가면 갈수록 주민들의 경제적 상태나 지위는 빈민층에 가까워진다. 최상층에 거주하는 이 건물을 만든 건축가는 왕 같은 존재다.

건물은 전기 시설에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정전이 자주 일어나다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완전히 전기가 나간다. 청소부들은 밀린 월급을 주지 않으면 청소를 하지 않겠다고 도망친다. 상층은 햇볕이 잘 들어와 낮에는 여전히 제법 환하지만, 하층은 모닥불이나 촛불에 의지하지 않으면 생활하기 힘든 수준이 된다. 전기가 나가기 전부터도 상층과 하층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전기가 나간 시점을 기준으로 상층 사람들은 하층 사람들이 상층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계단을 막고 엘리베이터를 독점한다.

하층은 먹고 살기도 힘들어졌지만, 상층은 난교 파티를 벌이며 여전히 흥청망청 편안하게 생활한다. 랭은 상황에 지속적으로 적응하며 살아가고, 원래부터 상류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와일더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 대박을 잡기 위해 상층 주민과 건축가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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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줄거리를 잘 정리해보고 싶지만, 이 정도가 한계다. 이 영화는 너무 난잡하다. 원작 소설을 119분이라는 상영 시간 속에 억지로 구겨 넣었다는 느낌이다. 너무 억지로 쑤셔 넣은 나머지 내용을 알아보기도 힘들어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몰입했던 것은 영화의 전개가 아니라 왜 혹은 어째서라는 의문문이었다. 왜 그들은 나가지 않는가. 왜 그들은 순응하는가. 왜 그들은 적응하는가. 영화는 일련의 전개들을 개연성 있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관객에게 대충 던져주고는 알아서 이해하라고 강요한다. 불친절을 넘어서 불합리하다.

영화 속에는 여러 가지 상징과 복선이 차고 넘친다. 와일더의 방에 있는 체 게바라 사진, 하얀색 페인트에 집착하는 랭, 옥상에 정원을 꾸며놓고 말을 기르는 건축가의 부인, 애완용 개를 잡아먹는 랭, 건축가를 죽인 와일더를 응징하는 여자들, 난교 파티, 샬롯의 아들, 만화경, 건축가의 피로 물든 옷. 중간에 테이프를 빨리 감듯이 급전개되는 건물 내 사회의 붕괴, 랭의 방 안에 계속 쌓여가는 박스들. 문제는 쉽거나 추측 가능한 상징들도 많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 도대체 랭은 왜 하얀색 페인트에 집착하지? 건축가를 죽인 와일더를 여자들이 칼로 난도질하는 건 뭐지? 어느 시점부터 건축가가 핏자국이 잔뜩 남은 겉옷을 입고 있는데 뭐지? 왜 그 옷을 경찰 앞에서는 숨기는 거지? (아, 물론, 단순히 내 지식이나 이해력이 달려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면 참 절망이다.)

의미를 알고 보면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다. 원작을 봤으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장면 하나하나 심도 있게 관찰하고 연구하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영화의 숨겨진 속뜻을 아는 데에나 도움이 되어야지, 영화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 것이지, 영화를 해석하기 위해 극장에 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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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러닝 타임을 늘려서 몇 부작으로 만들었다면 (영화로 힘들다면 드라마로라도) 재미있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마음에 들었을 것 같다.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