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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처음 삼십 분 정도가 흘렀을 때, 영화를 잘못 골랐음을 깨달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사전 정보를 최대한 찾아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가끔 시놉시스를 들춰볼 때가 있지만 그 정도. 많이 알아봐야 주요 출연진이나 감독 이름까지일까. 최대한 편견이나 선입관을 배제하고 영화를 보고 싶은 개인적인 바람 때문이다. 순수한 시선으로 한 번 보고, 다른 사람의 감상이나 해석을 보고 다른 관점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으니까.
그래서 당연히 이 영화의 사전 정보도 거의 없었다. 아는 것은 단둘. 이 영화의 여자 주연 배우가 얼마 전에 본 엑스 마키나의 주연이었다는 것. 그리고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 심지어는 제목의 뜻도 모른 채 극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시작부터 이 영화는 숨 막힐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있다. 게르다의 장난으로 시작된 아이나의 여장, 성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릴리로서의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나. 그로부터 시작된 갈등, 파국. 여장한 채 갔던 파티에서 정체를 들킬뻔한 장면이나 다른 남성에게 키스를 당하는 장면, 아이나가 참지 못하고 집을 빠져나와 근처 극단(?)의 의상실에서 옷을 전부 벗고 거울을 바라보며 여성스러운 몸짓을 취하는 장면 등에서는 차마 화면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런 넘치는 긴장감이나 갈등을 잘 감당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잔잔하고 조용한 영화를 선호한다. 아니면 아예 그냥 '섬세한 감정 따윈 개나 줘버려' 하면서 때려 부수는 영화를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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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세계 최초로 현대식 성전환 수술을 받은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이 원작인 영화다. 약 백 년 전, 트랜스젠더의 개념조차 거의 없었을 시절,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 정신병자로 몰아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이나는 부인인 게르다의 장난으로 인해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변해가는 내용을 다룬다. 아이나는 ー 릴리는 처음에는 어떻게든 참고 제어해보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릴리로서의 자신이 진정한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게르다는 처음에는 고칠 수 있는 병이라 생각해 방사능을 동원한 치료까지 시도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남편의 정체성을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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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의사가 자신을 미쳤다고 한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마저 남편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다시는 그녀의 남편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야말로 고립무원.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런 릴리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물심양면 도와주는 게르다에게는 존경심마저 느낀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생각할 때 더더욱). 그녀는 자신의 장난을 후회했다. 자신이 릴리를 만든 것이라고 후회했다. 남편을 돕기 위해 남편의 옛 친구까지 집으로 초청하지만 이조차도 역효과가 나고 만다. '남편'의 '증세'는 더 심해지고 결국 남편으로 돌아오는 것을 완전히 거부하게 된다. 얼마나 자책하고 후회했을지. 하지만 릴리는 '네가 릴리를 만든 게 아니라 깨운 것뿐이다. 릴리는 옛날부터 내 안에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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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까지는 되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영화를 봤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찾은 극장에서. 그래도 다 보고 나서는 나름 후련했다. 그녀의 전 부인과 그녀의 친구는 그녀를 끝까지 믿고 응원해주었다. 그녀는 결국 죽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그녀가 원하던 진정한 여성이 될 수 있었다. 시대를 생각해봤을 때, 아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녀에게는 가장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주변이 시선에 굴하지 않고, 현실에 굴하지 않고, 시대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끝내 자신을 찾아냈다.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I am entirely myself.
난 온전한 내 자신이 됐어.
- 릴리 엘베 Lili El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