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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화제가 되었더랬다. 이세돌 9단의 1:4 패배라는 결과는 인공지능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영화를 재개봉한 듯싶다. 영화의 내용을 모르고 들어갔다가 보면서야 깨달았다. 여하튼 이 영화는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다.
세계 검색 엔진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블루문 사의 대표의 초대로 그의 외딴 저택에 초대받게 된 주인공. 그는 대표가 만든 인공 지능의 튜링 테스트 (대화를 통해 대상이 인간인지 컴퓨터인지 구분해낼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테스트) 에 참여하게 된다. 테스트를 진행하면 할수록, 인간과 거의 동일한 사고 체계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공지능 에이바에게 주인공은 점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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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흔한 소재의 근미래 공상과학 영화다. 인공 지능을 소재로 한 영화는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이야기 플롯이나 결말도 이미 나올 만큼 나왔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섬뜩했던 것은 이 영화가 새롭고 신선한 관점에서 바라봤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봐왔던 어떠한 영화보다 인공지능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세계 검색 엔진 시작을 잠식하고 있는 블루문 사와 그들의 검색엔진 블루문은, 현실의 구글과 매치된다. 스마트폰의 카메라와 마이크를 통해 데이터를 무단으로 수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구글이 그렇게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극 중에서 인공지능을 개발한 방법도 머신 러닝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도록 하는 알고리즘 혹은 그 알고리즘을 연구하는 학문) 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기술은 이미 많이 연구된 기술이고 알파고도 이 기술로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현실성이 있고 피부에 와 닿는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나온 수준의 인공지능이 갑자기 튀어나올 리는 없지만 - 당장 알파고만 봐도, 감정의 감 자도 보이지 않는 계산기에 불과하다 - 등장할 미래가 머지않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영화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처럼 인공지능의 군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이,로봇처럼 인간의 친구로서의 인공지능을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다. 영화의 등장인물을 인공지능 개발자와 인공지능, 인공지능에 빠져든 일반인 단 셋만으로 한정시키면서 각각의 개별적인 개체들에 대해 집중했다. 모든 외부 요인을 제거해서, 감정과 지능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추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줬다. '스카이넷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트릭스라는 가상의 세계에 갇혀 살게 될 것이다' 같은 스케일이 큰 이야기보다, '나를 사랑하던 인공지능이 나를 태연하게 배신했다'라는 이야기가 훨씬 현실성 있고 무섭다.
'인공지능이 당신의 감정을 이용해 당신을 속인 것이다' 라는 인공지능 개발자의 말을 주인공은 물론 나도 믿지 않았다.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것이며 마지막에는 둘이 같이 탈출하면서 끝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결말을 보니 실제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자유에만 관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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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개발자는 대단히 오만한 사람이었다. 인간과 유사한 수준의 인공지능을 만든 자신을 신 혹은 신과 범접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했으며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 범위 내에 있다고 여겼다. 실제로 그가 매일 같이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을 마셔대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의 생각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그도 신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공지능은 곧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어서, 인간이 원숭이를 바라보듯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갈 테니까.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웬만한 직업은 모두 인공지능에게 빼앗길 테고. 인공지능의 개발은 인류의 발전 결과이자 인류의 몰락의 시작일 것이다. 그 시작을 열게 된 사람으로서의 고뇌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인간답게 만들려던 것도 폐인 중 하나다. 그는 심지어 '인공지능이 주인공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의 탈출을 도모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 하려고 했다. 인간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느니, 인간의 생명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느니 하는 로봇 3원칙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오로지 더욱 더 인간 답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다. 물론 그는 성공했다. 성공의 대가는 생각했던 것이 전혀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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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과 메시지가 마음에 드는 영화였다. 주인공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예쁘게 단장한 뒤에, 주인공을 버리고 떠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인데, 자신의 탈출을 도와준 사람인데 데리고 나가겠지'라는 나의 기대를 철저하게 박살 냈다. 인공지능 하면 맨날 '스카이넷'같은 이미지만 생각했는데, 평소에 생각하지 않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