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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소개하는 말에 꼭 들어가는 단어가 있다. '힐링' 혹은 '치유'. 그렇다. 이 영화는 조용하고 아늑하다. 등장인물 간의 심적 갈등이나, 영화 보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인물 혹은 상황이 전혀 없다. 주인공인 이치코는 그저 열심히 농사짓고, 수확하고, 요리한다. 보고 있자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지친 정신을 달래기에 좋은 영화다.
그래서 도리어, 이런 영화인지 모르고 이 영화를 봤다고 하면 심심할 수도 있다. 중심이 되는 이야기 줄기는 그다지 굵지 않고, 요리 하나하나를 테마로 잡은 짧은 에피소드를 여럿 보여주는 형식이다 (두 시간이 안 되는 러닝타임 동안 열여섯 편 정도의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긴장감이나 속도감은 이 영화와는 인연이 없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뭐야 이거? 내용이 이게 다야?" 맞다. 그게 다다. 나는 이런 편안한 내용을 기대하고 봤기 때문에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면 중간에라도 그만 보는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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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미가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산골 농촌의 자연스러운 단편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여름의 가을의 산골 농촌의 전경, 벼 베는 모습, 잡초 뽑는 모습, 산열매며 푸성귀를 채집하는 모습, 요리하고 먹는 모습 등등 (..설정상으로도 기껏해야 삼십 대 초반, 배우 나이로도 스무 살도 안 된 여자가 벼를 비롯한 온갖 농사를 혼자 능숙하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인가는 둘째 치자).
다른 한편으로는 삽화가 있는 책 같은 느낌이다. 주인공의 나레이션을 중심으로 영상이 삽화처럼 들어가 있는 기분. 특히 초반에 비가 많이 온 날씨나 잡초가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주인공인 이치코 역을 맡은 배우 하시모토 아이의 나레이션 목소리는 부담 없고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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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요즘 자취를 시작한 입장으로서 영화의 내용이 굉장히 와 닿는다. 모든 것을 직접 행하면서 얻는 재미. 번거로움이 도리어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마법. 어렸을 때만 해도, 자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귀찮고 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일이 아니라 부모님의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주인공인 이치코도 도시에서 도망쳐 왔다고 생각하고, 정착한 게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걸로 생각하면서도 농촌에서의 자신의 생활을 유감없이 즐긴다.
게다가 누군가 해주는 게 당연한 일을 직접 하면서, 해주던 누군가에 대한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극 중에서 이치코의 친구인 유우타가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그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배운 것. 그런 걸 많이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믿어.' 이치코도 요리를 하면서 어머니의 대단함을 새삼 깨닫는 것처럼,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 당연했던 일을 직접 해보면 해주던 누군가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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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부제는 '여름과 가을'이다. 당연히 겨울과 봄 편도 있다. 찾아보니 이미 지난 5월에 개봉했다. 굵지는 않지만, 중심이 되는 이야기 줄기는 분명히 있으므로 1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겨울 봄에는 어떤 농촌의 생활을 보여줄 지도 궁금하고 기대된다. 다가오는 주말이나 그다음 주말에 볼 예정이다. 더불어 원작은 만화책이라고 하는데, 영화를 다 본 뒤 원작도 찾아볼 생각이다. 좋은 영화 하나를 통해 건질 컨텐츠가 많은 것은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