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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가 나오는 작품을 많이 보지는 않았다. 영화는 '28일 후', '레지던트 이블', 게임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만화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작품들 몇 개.
(사족; '28일 후'는 감염자들이 분노 바이러스에 걸린 '살아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비물로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도 비슷한 이유로 더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좀비물로 보지 않는다.)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좀비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어떤 식의 이야기들인지 대충은 알고 있다. 이미 정형화된 장르이고, 작품들은 대체로 공식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좀비에게 물리면 감염되고, 감염되면 죽은 뒤 다시 살아나거나 혹은 죽진 않더라도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이며, 좀비들은 사람들을 감염시키거나 잡아먹으려고 혈안이고, 주인공들은 그들을 피해 도망치거나 치료법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어떻게 표현하나 정도의 차이이지 대부분은 이 스토리라인을 따라간다.
이 작품도 큰 틀에서 보자면 그런 클리셰를 비껴가지 않는다. 좀비들이 창궐하고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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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좀비물은 국지적이다. 좀비 바이러스와 좀비의 영향은 전 세계적이나, 이야기는 국지적인 면에 집중한다.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말이다. 그들의 고난, 전투, 갈등, 감정에 대해 집중한다.
이 소설은 다르다. 전 세계를 휩쓸고 간 10년간의 좀비와의 전쟁, 이른바 '세계전쟁Z'가 끝나고 10년 뒤,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기 위해 화자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했던 인터뷰들을 엮은 형식이다. 굳이 따지자면 화자가 주인공이랄 수도 있겠지만, 화자는 서문과 인터뷰 전 간단한 설명과 인터뷰 중 질문을 제외하고는 일절 말을 하지 않는다.
특별한 주인공 없이,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좀비전쟁'의 전조부터 종전까지를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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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사실적이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미국이다. 믿기 어렵고 해결하기는 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자 덮기에 급급했던 미국 정부는, 사태가 민간인들에게 알려진 후에도 미봉책과 전시행정에 집중한다. 군은 인간과의 전투만 생각하며 안일하게 좀비 떼와 대규모 전투를 벌이다가 대패하고, 민간인들은 추운 지방으로, 먼 해외로, 바다로, 혹은 뚜렷한 목적지 없이 어디로든지 피난을 떠난다. 누군가는 사람들의 공포를 이용해 가짜 백신을 만들어 떼돈을 벌고, 누군가는 공포에 미쳐 좀비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현실적인 해결책이 등장해 사태가 해결되기 시작한 것은 세계적으로 억 단위의 사람들이 죽은 뒤다.
미국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좀비에 대한 위협을 제일 처음 인정하고 대처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미국에 자신들의 약점을 노출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사태를 감추었던 (그리고 사태의 시초라 추정되는) 중국, 난민들이 몰려든 대양과 섬들, 중세시대에 지어진 성에 자리를 잡고 견고히 버텼던 영국, 본토를 포기하고 탈출했던 일본, 전 국민을 땅굴로 끌어모은 듯 인적이 없어진 북한, 그런 북한을 보며 불안해하는 한국, 군대와 국민을 강압적으로 억압했던 러시아, 잘 대처한 덕분에 난민이 몰려들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쿠바.
너무나 다양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위에서는 국가의 입장만을 예를 들었지만 실제로 책 속에는 군인, 밀수업자, 의사, 교수, 사업가, 우주비행사, 히키코모리 등 여러 개인의 측면에서도 다양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토록 입체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취재를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인터뷰는 모두 허구이지만 작가는 아마 이 책을 쓰기 위해 책에 들어간 내용의 몇 배의 분량을 취재하고 인터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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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상상했던 것은 정형적이고 공식화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책 속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좀비'라는 소재를 이용했을 뿐, 이야기는 국가 규모의 감당하기 어려운 실제적인 위협이 나타났을 때 국가와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고 대처하는지에 대해 사실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좀비물'에 이토록 감탄하고 빠져들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