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장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1장은 아이들을 위해 천편일률적인 학교 건물들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작가의 주장들이 어이없다.

우리나라 학교 건축은 교도소 혹은 연병장과 막사의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 12년 동안 생활한 아이들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p.26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이런 시설에서 12년을 보낸다면 그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똑같은 옷, 똑같은 식판, 똑같은 음식, 똑같은 교실에 익숙한 채로 자라다 보니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이상한 사람 취급하게 왕따를 시킨다. p.28
똑같은 공간에서 12년을 지내는 아이들이 정상적인 인격으로 성장하기 바라는 것은 무리다. p.41

모든 잘못됨의 원인을 건축으로 단정 짓고 있는데, 대부분의 주장에는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다. 논문이나 기사를 인용하거나, 하다못해 출처가 불분명한 실험 결과나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지도 않는다. 상식에 기반하는 내용도 아닌데, 저자는 자신의 생각이 마치 당연하고 확실한 진리인 양 단언한다. 그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읽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의 말은 무조건 옳아'라는 전제를 세우지 않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말하는 방식이 너무 난폭해서 화가 날 정도였다. '내 말은 무조건 맞아. 의심하지 말고 들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

일단 그래도 계속 읽었다.

1장만 그럴 수도 있다. 어렵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생략함으로써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후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뒤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뒤에서는 간간이 다른 글 혹은 말을 인용함으로써 근거를 제시하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몇몇 문장을 더 인용해본다.

이들은 평등을 획일화를 통해 이루려 한다. 평등은 다양성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만약 내가 5천 원짜리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는데 당신이 만 원짜리 수제 햄버거를 먹는다면 나는 기분이 나쁠 것이다. 우리 둘 다 똑같은 크기와 종류의 음식을 먹는데 가격만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만 원짜리 수제 햄버거를 먹을 때 내가 5천 원짜리 쫄면을 먹는다면, 나는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두 종류의 음식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p.50
마이클 잭슨은 평소 한 손에 장갑을 끼고 다녔다. 이는 세상과 자신을 구분하는 패션 장치다. p.104
왜 사춘기 청소년들은 화장실을 가지고 자주 싸울까? 사춘기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기 방문을 잠그고 커튼도 친다. (중략) 사춘기 아이들의 최후 수단은 화장실에 가서 문을 잠그는 것이다. 적어도 화장실만큼은 생리적인 이유로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p.105
마찬가지로 하나의 스타일로 된 모든 유니폼도 조직을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대기업 사원들은 특정한 유니폼이 없지만 너도나도 짙은 양복을 입는다. 자신이 전체의 일부가 되었다고 안심하는 동시에 다른 조직에게 하나 된 위압감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p.211
우리가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도 이러한 권력 추구의 본능이 반영된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높은 산의 정상의 오르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권력욕이 많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다. p.216
이러한 내용의 사회학 논문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건축적으로 유추해보면 도시 고밀화와 사회 진화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 p.360

근거도 빈약하고 비유도 너무 허무맹랑하다. 마이클 잭슨에 관한 내용은 아예 틀렸다. 잭슨은 패션이 아니라 백반증 때문에 장갑을 꼈다.

#

이 책의 왜 '어디서 살 것인가'인지도 궁금하다. 책의 내용이 '어디서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건축에 대해 알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것 같다.

제목이 책의 주제와 내용을 대표하고 축약한 것이라는 내 지식이 틀린 게 아니라면, 6장과 7장은 이 책에 필요 없다. 8장도 빼도 무방하다. 언급한 세 장 이외의 다른 장들도 군살이 너무 많다.

#

책에 쓰여 있는 작가의 약력을 보면 내가 무시할만한 사람은 아니다. 학력도 굉장하고 현직 교수 겸 건설 컨설턴트이며, 방송에도 수차례 얼굴을 내민 사람이다.

그가 책에서 한 말들이, 대부분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좋은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장하는 바에 대한 근거는 부실하고, 글은 하나의 주제로 잘 집약되지 않는 느낌이다. 차라리 제목을 다르게 했다면, 아니면 내용을 줄이고 축약하고 압축했다면 나았을 것 같다.

좋은 책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