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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어렵다.
한국적인 배경에 앨리시어라는 이름. 1인칭도 아니고 3인칭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시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씨발', '새끼' 같은 단어. 그것들이 불쾌하거나 짜증 난다기보다는 어색하다. 먹어본 적 없는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었을 때 느낄만한 생경함. 과연 이것을 계속 먹으면 익숙해질까 아니면 진저리치게 될까. 그 막막함 앞에서 계속 읽기가 힘들었다.
본래 이 책은 저번 주말에 읽을 예정이었다. 일정이 있긴 했지만 책이 얇아서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가, 잘 읽히지 않아서 당황했다. 아무래도 이 책은 다음에 읽어야겠다 하고 서점에 들러 다른 책을 샀는데 그 책마저도 잘 읽히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결국 이 책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도 진저리치진 않았다. 중반 정도 읽었을 때부터는 문체에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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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가정폭력에 관해 이야기한다.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에게, 그들의 어머니는 폭언 폭력을 일삼는다. 그들의 온몸이 멍과 상처로 뒤덮여 있는 것은 일상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 모습을 외면한다.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구청도, 상담 기관도 그들을 형식적으로만 대한다. 그 누구도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을 도와주지 않는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남의 집의 일이라 참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 정도는 가정 교육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신고하라고 혹은 도망가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어머니에게도 고통이 있을 것이니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웃기시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앨리시어는 꺼져라.
그렇게 할 때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라니까. 그런 순간에 그녀는 한 점 빗방울처럼 투명하고 단순하다.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거야. 때리니까 때리고 싶고 때리고 싶으니까 가속적으로 때린다. 참지 못한다기보다는 참기가 단지 싫은 것이다. 때려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내면에 쌓는 일이 귀찮고 구차해 이것도 저것도 마다하고 때리는 데 몰두하는 것이다. p.41
이야기 속 누구도 앨리시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앨리시어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 모두 사건의 당사자로서 발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정폭력으로 인해 무너진 한 가정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마을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극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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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상징적인 표현과 요소들을 많이 사용한다. 논둑에 누워있는 개, 앨리시어의 아버지가 키우는 개장 속 개, 네꼬라는 존재와 갤럭시, 복숭아술이 유명한 마을의 이야기, 큰 나무 아래의 앨리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의 가장 큰 상징은 역시 앨리시어라는 인물 그 자체이다.
앨리시어는 이 작품의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의 피해자들, 그리고 가정폭력 사건 그 자체를 의미한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고, 주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불쾌해지지만, 누구도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사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
그러나 그대는 앨리시어가 걷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불시에 앨리시어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중략)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달라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대가 먹고 잠드는 이 거리에 이제 앨리시어도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까. 앨리시어라는 것은 잠시에 불과하다고 말할까. (중략) 모두, 언제고 지나갈 것이라고 말할까.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고, 앨리시어도 그의 이야기도, 결국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할까.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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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나 권선징악과는 거리가 멀다. 해피 엔딩과는 인연이 없다. 16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읽기 쉬운 책도 아니다.
읽어봤던 작가의 다른 작품들(계속해보겠습니다, 백의 그림자)과도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 읽기 전 기대했던 분위기나 문체는 전혀 아니다.
읽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읽어볼 만한 작품이었다.
취향이 많이 갈릴 것이기 때문에 쉽게 추천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