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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주인공이 민통선 안 국립 수목원의 계약직 세밀화가로 일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세 갈래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주인공과 부모님의 이야기, 주인공과 수목원 연구실장 안요한의 이야기, 주인공과 인근 부대 김민수 중위의 이야기.
이야기는 세 갈래를 순차적으로 말하지 않고, 31개의 작은 이야기들로 쪼개져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이야기들은 시간순으로 놓여있고, 작은 이야기 안에서 서로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동시에 논하지는 않는다.
세 갈래를 아우르는 중심은 모호하다. 세 갈래의 이야기가 하나의 포크처럼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 같으면서도, 제각각 별개의 이쑤시개로써 각기 다른 과육에 꽂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든 꿰매고 이어붙이면 하나의 중심을 만들지 못할 것은 없지만, 한다고 해도 나로서는 결국 억지로 한 것에 불과하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작품의 본질이 어떻든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하였거나 찾지 못하였으니, 하나의 중심을 찾기보다는 밀접하게 연관된 각기 다른 세 이야기로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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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에 위치한 수목원 및 그 주변의 풍경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주인공이 머무르는 일 년 사계절 동안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산림과 고원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단, 문장들은 곱씹어야지만 묘사로서 동작하고, 곱씹지 않으면 단어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빨리 읽기는 힘들지만 천천히 읽다 보면 그 표현 방식과 표현력에 감탄하게 된다. 무슨 말인가 싶다가도 작가 특유의 문체에 적응하게 되면 눈앞에 그려놓은 것처럼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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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훈이 쓴 책이다.
그는 절제된 문장과 문체로 많은 작품들을 썼고, 특히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 시대물 장편을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으로는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고를 지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0년경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입으로 밝힌 바가 있고, 그의 작품들의 여성들은 보통 중심적인 역할을 갖지 못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여성에 대한 부족한 표현이나 묘사에 대해 '여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서투른 것이다. 내 미숙함이다' 라고 밝힌 바가 있다.
그렇게 말한 그가, 여성을 일인칭 화자로 해서 쓴 장편소설이 이 '내 젊은 날의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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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두 번째 읽는 것이다. 첫 번째는 2010년 말 혹은 2011년에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은커녕 순수 문학 자체를 거의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판타지 소설, 추리 소설 같은 장르 소설만 읽었고, 그마저도 많이 읽지는 않았다.
어렸을 적의 나에게 순수 문학은 기승전결이 희미하고 밋밋한 소설이었다.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이상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소설을 1차원적으로밖에 보지 못했다.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하지 사건 속 인물들의 내면이나 감정에 대해서는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순수 문학은 별 시답잖은 이야기나 해대는 고리타분한 것들이었고, 장르 문학이야말로 읽기 좋은 읽고 싶은 책이었다.
그런 내 기존의 생각을 바꿔준 것이 이 작품이었다.
페이지마다 빼곡한 글씨들, 그리듯이 풍경을 묘사하는 문단들. 곱씹어야지만 이해가 되는, 언뜻 보면 현학적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명료한 문장들. 그 모든 것이 문화 충격이었고, 이 책 이후로는 한동안 김훈의 거의 모든 책을 찾아 읽었다. 그 지점이 순수문학에 대한 내 독서의 시작점이었다. 대단히 의미가 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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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 읽을 때는 처음 읽었을 때와 상황이 달라졌다. 나이를 좀 더 먹었고 다른 책들을 좀 더 읽은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김훈 작가의 성향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여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서투른 것이다. 나의 미숙함이다'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작가가 (이 언급은 2017년에 한 것이다) 일인칭 시점의 여성 화자를 가지고 책을 썼다. 나는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졌다.
작가처럼 나도 여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소설이 여성의 내면과 심리를 잘 써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여성 화자를 가진, 읽어봤던 다른 소설들과 비교했을 때 여성적이라기보다는 중성적인 글로 읽혔다. 그것이 김훈의 (내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적은) 문체 때문에 그렇게 읽히는 것인지 실제로 그렇게 의도하고 썼기 때문인지는 모호하다.
책 속의 몇몇 문장을 통해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작가는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봄으로써 남성을 객관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효과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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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내가 읽었던 김훈의 다른 장편 소설들에 비해 편하게 읽힌다. 인물 간의 갈등이나 내면에 대한 파고듦이 다른 작품들보다 덜하다.
좋은 문장들이 많고 잘 읽히기야 하지만, 긴장감이나 흡입력, 여운은 크지 않다.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에세이나 일기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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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다른 장편소설들에 비하면 조금 심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 갈래로 나뉜 이야기 각각은 각각의 매력이 충분하고, 작가의 다른 장편소설들에 비해 심심할 뿐, 그다지 심심한 책도 아니다.
인적이 없는 숲에, 빽빽한 나무들 위로 새하얀 눈이 쌓이는 광경. 그것이 '내 젊은 날의 숲'의 풍경이다.
추천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