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적이다.
분명 근현대의 우리나라 (대략 90년대? 느낌) 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림자가 일어난다느니, 일어난 그림자를 따라가면 안 된다느니, 나 혹은 나의 가족 혹은 나의 지인도 그림자가 일어난 적이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등장인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림자가 일어나는 것'은 미신이나 전승의 영역이 아니라 종종 혹은 빈번히 일어나는 사실이다.
그 천연덕스러움이, 별다른 부가 설명 없이 나아가는 이야기가, 현대적이면서도 이질적이라서 어른들을 위한 동화 혹은 현대를 배경으로 한 동화로 느껴진다.
#
다른 한편으로는 고요한 흑백 만화 같다. 말풍선이 없는 칸들을 많이 넣어서 여백의 미를 잘 살린, 말이 많지 않은 책. 잔잔하다.
#
그림자는 절망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그림자가 일어나는 것을 우울증으로 대입해도 아귀가 얼추 맞는다. 그림자가 진득하게 달라붙은 것을 부정적인 감정에 온몸을 내맡긴 것으로 해석해도 얘기가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원래 그림자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는 그것은,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일어나더라도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몸에 달라붙게 놔둬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이야기의 시작에서, 은교는 그림자를 따라갈 뻔했다. 그 상황을 도와준 것은 무재였다. 그는 은교에게 그녀가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지 알려주었고 (은교는 그림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 와중에 둘은 숲에서 길을 잃지만, 서로를 의지하여 결국 빠져나온다.
이야기의 끝에서, 무재는 그림자에게 끌려갈 뻔했다. 그 상황을 도와준 것은 은교였다. 민가는커녕 인적조차 없는 시골의 도로에서 그의 차는 고장 났고, 무재와 은교는 고립되었다. 그녀는 (안 그래도 세상의 허무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키워가고 있었던) 나쁜 상황에서 절망에 빠진 그에게 손을 내밀고 사람이 있을 곳까지 걸어가자며 그를 이끌었다.
걸어갈까요?
라고 말하자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나루터로.
......이렇게 어두운데 누굴 만날 줄 알고요.
만나면 좋죠, 그러려고 가는 거잖아요.
만나더라도 무재 씨, 그쪽도 놀라지 않을까요, 우리도 누구라서, p.167
#
바로 앞 몇 미터까지만 비추는 가로등 빛, 그 밖은 새까만 어둠이다. 도로 옆의 벌판은 물론 온 길과 가야 할 길 모두 짙은 어둠 속에 녹아 있다. 다음 가로등까지는 멀다. 다음 가로등까지 걸어가더라도 민가는 여전히 보이지 않을 것이며 다시 어둠 속을 걸어야 한다. 언제까지 걸어야 할지 기약 같은 건 없다. 하지만 그들은 걷기로 했다.
그들의 걸음은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빛이 있을 때보다 빛이 없을 때가 더 많은 길. 자동차는 없거나 고장 났고, 언제까지 걸어야 목적지가 나올지 알 수 없고, 무섭고 두렵고 힘들다. 하지만 걸어야 한다. 주저앉을 수는 없다.
그들은, 은교와 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도록, 그림자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버팀목이며, 길을 잃지 않도록 주저앉지 않도록 도와주는 동행이었다.
차라리, 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도록 어두워지자, 이참에, 라고 생각하며 눈을 뜨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중략) 엎드린 채로 받고 보니 무재 씨였다. p.90
#
우울함이나 절망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없이 살 수는 없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이 아니라, 어딘가 나사가 빠져버린 정신 나간 삶이다.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감정이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을 잘 견뎌내며 극복해내며 사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것도 그것이다.
#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낼 수 있겠지만,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거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여 씨 아저씨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으로도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은교와 무재는 그것이 힘들었고 결국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
이야기는 비유적이고, 추상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 현학적인 이야기가 되거나 지나치게 난해한 이야기가 되는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다.
해설을 합쳐도 200페이지가 안 되고 (나처럼 해설을 안 읽거나 나중에야 읽는 사람들에게는 더 얇게 느껴질 것이다) 일곱 장으로 나뉘어 호흡도 적당히 끊어가며 읽을 수 있다. 누구나 무난히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추천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