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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스포일러를 먼저 접했다. 내가 들은 스포일러는 아래와 같다.
"...'종의 기원'도 결국 사이코패스 이야기잖아요...."
몇 달 전 참여했던 독서 모임에서, 살인자의 실화를 담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분이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다. 단 한 마디, 무심하게 말했던 말. 나는 그 말이 스포일러라고 생각도 못 했다. 그저 '재밌겠네 나중에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마침내 종의 기원을 구입해 책의 1부를 읽었을 때야 깨달았다. '아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스포일러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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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화나지는 않았다.
스포일러를 하는 것도 당하는 것도 매우 싫어하지만, 악의적이거나 고의적인 스포일러는 아니었기 때문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 게다가 적당한 스포일러는 책을 읽을 동기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번 경우 또한 내가 이 책을 고르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에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적당한 스포일러'가 아니라는 데 있긴 하다.
처음 읽는 책이건만, 처음 읽을 때부터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읽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경우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걸까?' '범인이 누구일까?' '진짜 주인공이 맞나?' '정말 주인공은 사이코패스인가?' 등으로 사고가 나아가야 하는데, 이미 시작부터 진범과 동기를 확실히 알고 시작한 셈이니 말이다.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힘든 소설이지만, 추리물에서의 범인과 트릭을 스포일러 당한 것과 똑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가 나진 않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는 법이다. 다시 읽어도 재미있는 책 말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책이 있다. 스포일러를 당해도 여전히 재미있는 책이. 이 책이 그런 책이다.
....물론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았다면 더 재밌었을 것이다. 그건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물은 이미 엎질러져서 책장을 다 적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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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주인공은 자신의 온몸은 물론 온 방이 피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상처는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피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젯밤 발작의 부작용으로, 주인공은 어젯밤의 기억이 거의 없다. 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주인공은 자신의 침대에서 끝나는 핏빛 발자국을 역으로 추적한다. 그리고 집의 거실에서 어머니의 시체와 대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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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인공에게 몰입하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주인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이코패스의 전형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고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길가에서 모르는 여자를 죽였을 때도, 그것을 알게 된 어머니와 다투다가 결국은 어머니를 죽였을 때도, 그 사실에 대한 기억을 잃은 채 어머니의 시체와 대면했을 때도,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을 때도, 그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어버린 어머니를 원망하기까지 한다.
이런 인물에 감정 이입을 한다니, 거의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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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어머니의 일기를 통해 주인공의 상태를 묘사하는 글들이 나온다.
유민이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는 성격이라면, 유진은 모든 채널을 오롯이 자신에게만 맞춘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도 하나뿐일 거라고 했다.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p.249
집중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호흡이나 맥박의 속도가 뚝 떨어졌다. 얌전하거나 유순하거나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흥분의 역치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는 유진의 심장이 뛰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중략)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p.259
주인공은 그 말들에, 그 평가에 대해 맞고 틀림을 논하지 않는다. 그는 고작 그런 검사의 결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삶을 억압했음에 분노를 느낀다. 재미있게도, 그 평가들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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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반부에서 주인공의 제일 친한 친구이자 의붓형제인 해진의 자수 권유에도 그는 위의 평가 기준을 그대로 대입한다. 그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처음에는 해진이 자신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 생각해 갈등하다가도, 결국에는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결심한 뒤에는, 남은 감정 따위는 없다. 상대방은 이제 없어져야 할, 자신에게 해로운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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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들 중,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가장 잘 들여다본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이코패스 혹은 사이코패스로 추정되는 사람이 등장하는 책들에서, 일반적으로 책은 그들의 잔혹성과 무자비함, 그리고 엽기적인 범죄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일인칭 시점으로 주인공의 내면을 보다 상세하게 보여줌으로써, 공감 능력 결여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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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열쇠였던, 주인공의 기억 누락에 대해서는 머리를 갸웃하게 된다. 저렇게 형편 좋게 자신의 기억을 누락하는 게 가능한가? 소설적 장치로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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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 시점에서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이 색다른 재미를 준다.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고 긴장감 있다. 머리 아프거나 심오한 이야기는 없으므로 가볍게 읽기도 좋다. 부담 없이 추천할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