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한강)

2018. 4. 23.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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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이다.

130페이지의 많지 않은 분량 안에서, 3개의 큰 제목으로 60여 개의 작은 제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야기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지 않고 짧게 짧게, 여백을 넣으며 이어진다.

이야기는 선명하지 않다. 나누어진 이야기들은 한 편 한 편이 산문시 같다. 문장과 문단은 머릿속에 들어오면서 영상으로 변한다. 하얀 것들이 머릿속에서 고요하게 자리를 잡는다.

영상미가 훌륭한 소설이다.

어느 사이 골목이 어둑해져 있었다. 아직 가로등은 켜지지 않았다. 두 손에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엉거주춤 서서,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들의 움직임을 나는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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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화자의 일기다. 생각이 날 때마다 무언가를 느낄 때마다 짤막하게 써놓은 글들을 엮어내었다는 느낌이다. 표지에 소설이라고 쓰지 않고 에세이라고 썼다 해도 별 거부감 없이 믿었을 것이다.

분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다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읽는 게 느린 나도 세 시간도 되지 않아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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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작품은 한 번만 읽은 적이 없다. '채식주의자'와 '희랍어 시간', 두 작품을 읽어보았는데, 그 두 작품의 훌륭함이나 마음에 듦은 둘째 치고 한 번만 읽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읽기 힘겹다. 추상적이거나 간접적인 표현들, 가볍지 않은 내용, 밝지 않은 분위기. (그럼에도 다시 찾아 읽게 되는 것이 묘하다.)

그나마 이 작품은 읽기 편했다. 여전히 가볍지 않고 밝지 않지만, 여전히 추상적이고 직접적이지 않지만, 이미지만은 명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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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흰'이지만, 작품 내내 흰 것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 책은 회색이라고 생각한다. 눈이 내릴락 말락 하는 하늘의 흐린 빛깔. 그 하늘 아래 조용히 멈춰있는 도시. 그런 도시를 높은 층에서 창문 너머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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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다. 띠지에는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화자의 어머니가 했던 말을 인용해놓았다.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을 잘 알겠지만,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어버린 언니와 흰 것들을 엮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상처 입은 화자가, 스스로에 대해 고뇌하고 고찰하는 내용이라고밖에는.

(나의 독해력이 문제인지, 작가의 문체가 문제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전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메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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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책은 내 속에서 그저 강렬한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회색 하늘 아래의 고요하고 정적인 겨울 도시.

무엇을 말하려는 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든다. 내용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영상미가 좋은 영화 같은 느낌이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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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설책보다는 시집에 더 어울린다.